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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제동 휴게실 (자유게시판)
..우리 아버지..
유영천 98/12/30 05:28 | 조회수 61
몇일전입니다.
동네 횟집에서 아버지 친구들 모임이 있었는데 뭘 좀 가져오라고 해서
나가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저히 아버지와 저는 한달이면 열 마디나 주고 받을까..거의 대화가 없고
20년 좀 넘게 살아오는 동안 좋은 소리는 별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입니다.그런 아버지가 제 자랑을 하시더군요.
"이 놈하고 나는 말이 필요없는 사이입니다...딸들처럼 귀여운 맛은
전혀 없지만...가끔 날 찡하게 합니다...난 저놈을 믿어요."
아..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나오려고 하더군요. 실망안시켜드리려고
나름대로 한다하고 했는데도 98년도는 기대만큼의 성과는 고사하고 안좋
은 일이 많았던..좀 씁쓸한 해였습니다.제 입에서 악화일로란 말이 나올
정도로 썩 좋지는 못한 한 해였는데,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절 믿어주신
겁니다.
98년 한 해 통틀어서 가장 기뻤습니다.
사실 전 아버지가 말씀 한마디 안하셔도 절 얼마나 생각해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아버지께 따뜻한 말 한마디 한적 없지만 아버지께서 제
맘을 알아주시길 바랬거든요.
표현이 없어도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멋지지 않습니까?
그것도 부모님의 믿음이라면 말입니다.
예전에 세용님이 쓰신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고 감동했었는데 저도
이런 글을 쓰게 되서 기쁩니다.
98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거 같군요.
----------------------------------------------------------------------
내가 날백수로 놀고 있을때였다.
대학교 2학년 가을에 한겨레정보통신(나중에 DDS가 됨)에 입사지원을 했었는데 요행히 붙었다. 그래서 학교 휴학하고 입사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격증 발표가 너무 늦는다는 이유로 회사측에서 입사를 취소해버렸다.
뭐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우울할것도 아니었지만. 학교를 이미 휴학한 상태라 6개월을 공으로 논다는게 얼마나 답답하던지.
이대로 군대를 가야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병역특례가 가능한 다른 회사를 찾아다녔다. 이력서 50통도 더 썼던거 같다. 면접도 엄청 많이 보러 다니고.
때마침 외환위기가 겹쳐서 취업은 더 힘들었다.
포트폴리오 들어있는 디스켓을 챙겨넣은 가방을 매고 면접보러 다니곤 했는데 겨울 바람이 얼마나 차게 느껴지던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당시엔 저런 글도 썼었구나.
당시 여느 평범한 가정처럼 우리집도 쉽지 않았다. 안그래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던 아버지 일이 외환위기를 맞아 더 힘들었으니까.
어떻게든 프로그래머로 취업해서 집에 좀 보탬이 되고 싶었었다. 부모님한테도 떳떳하고 싶었고.
나 고딩때 아버지는 내가 컴퓨터를 붙잡고 사는걸 싫어하셨다.
프로그래밍이든 뭐든 지금처럼 먹고살기 좋은 직업은 아니었던것도 사실이고 컴퓨터산업이 이렇게 미친듯이 발전할지 나도 잘 몰랐으니까. 우리 부모님 마음이야 무지 답답하셨겠지.
대학 입시때에 이어 두번째로 울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한테 내 자랑좀 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던 시기였다.
..우리 아버지..
유영천 98/12/30 05:28 | 조회수 61
몇일전입니다.
동네 횟집에서 아버지 친구들 모임이 있었는데 뭘 좀 가져오라고 해서
나가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저히 아버지와 저는 한달이면 열 마디나 주고 받을까..거의 대화가 없고
20년 좀 넘게 살아오는 동안 좋은 소리는 별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입니다.그런 아버지가 제 자랑을 하시더군요.
"이 놈하고 나는 말이 필요없는 사이입니다...딸들처럼 귀여운 맛은
전혀 없지만...가끔 날 찡하게 합니다...난 저놈을 믿어요."
아..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나오려고 하더군요. 실망안시켜드리려고
나름대로 한다하고 했는데도 98년도는 기대만큼의 성과는 고사하고 안좋
은 일이 많았던..좀 씁쓸한 해였습니다.제 입에서 악화일로란 말이 나올
정도로 썩 좋지는 못한 한 해였는데,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절 믿어주신
겁니다.
98년 한 해 통틀어서 가장 기뻤습니다.
사실 전 아버지가 말씀 한마디 안하셔도 절 얼마나 생각해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아버지께 따뜻한 말 한마디 한적 없지만 아버지께서 제
맘을 알아주시길 바랬거든요.
표현이 없어도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멋지지 않습니까?
그것도 부모님의 믿음이라면 말입니다.
예전에 세용님이 쓰신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고 감동했었는데 저도
이런 글을 쓰게 되서 기쁩니다.
98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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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날백수로 놀고 있을때였다.
대학교 2학년 가을에 한겨레정보통신(나중에 DDS가 됨)에 입사지원을 했었는데 요행히 붙었다. 그래서 학교 휴학하고 입사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격증 발표가 너무 늦는다는 이유로 회사측에서 입사를 취소해버렸다.
뭐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우울할것도 아니었지만. 학교를 이미 휴학한 상태라 6개월을 공으로 논다는게 얼마나 답답하던지.
이대로 군대를 가야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병역특례가 가능한 다른 회사를 찾아다녔다. 이력서 50통도 더 썼던거 같다. 면접도 엄청 많이 보러 다니고.
때마침 외환위기가 겹쳐서 취업은 더 힘들었다.
포트폴리오 들어있는 디스켓을 챙겨넣은 가방을 매고 면접보러 다니곤 했는데 겨울 바람이 얼마나 차게 느껴지던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당시엔 저런 글도 썼었구나.
당시 여느 평범한 가정처럼 우리집도 쉽지 않았다. 안그래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던 아버지 일이 외환위기를 맞아 더 힘들었으니까.
어떻게든 프로그래머로 취업해서 집에 좀 보탬이 되고 싶었었다. 부모님한테도 떳떳하고 싶었고.
나 고딩때 아버지는 내가 컴퓨터를 붙잡고 사는걸 싫어하셨다.
프로그래밍이든 뭐든 지금처럼 먹고살기 좋은 직업은 아니었던것도 사실이고 컴퓨터산업이 이렇게 미친듯이 발전할지 나도 잘 몰랐으니까. 우리 부모님 마음이야 무지 답답하셨겠지.
대학 입시때에 이어 두번째로 울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한테 내 자랑좀 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던 시기였다.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