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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스컬럼] ***로서의 나

조회 수 2125 추천 수 66 2008.03.17 02:39:10
[게이머(Gamer)]로서의 나

전 게임을 굉장히 좋아했었습니다. 지금도 몇몇 게임을 좋아합니다. 슬프게도 요새는 예전의 감동을 안겨줬던 그런 게임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온라인 게임들이 판친다는게 그 이유는 아닙니다.

어렵던 시절에 빵 한쪽을 잊을 수 없는것처럼, 게임이 흔치 않았던 시절에 어렵게 어렵게 플레이하던 그 게임들의 맛은 지금에 와선 절대 느낄 수 없는것이죠.

초등학교 3학년때 학교 컴퓨터실에서 테이프로 20분의 로딩을 거쳐(그나마도 성공확률은 60%) 즐겼던 알카노이드 게임, 디스켓 6장을 갈아끼워가며 즐겼던 pc판 인디아나존스3의 감동은 이젠 다신 느낄 수 없습니다.

LP판을 끌어안고 구식 모노 축음기를 그리워하는 매니아들의 기분과 상통할 것입니다.

디지탈계에선 전 구세대고 클래식 매니아입니다.




[프로그래머]로서의 나

확언하건데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프로그래밍을 시작하진 않았습니다.

컴퓨터를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프로그래밍입니다. 아니 그 당시엔 컴퓨터를 배운다고 하면 프로그래밍 언어(정확히는 basic)을 배운다는 뜻이었습니다.

87년도에 SPC1000 PC를 처음 구경하게 됐을땐,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냥 그때 처음 배운게 BASIC언어였습니다.

게임이 계기가 되어 프로그래밍을 다시 시작했지만, 프로그래밍 그 자체가 훨씬 흥미있습니다.

프로그래머서의 나는 게임엔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다만 게임이야말로 진정한 멀티미디어 기술이기 때문에 멀티미디어 기술로서흥미를 가지는 이슈는 있습니다.

컴퓨터는 대단히 흥미로운 장난감입니다. 이 물건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경우의 수라는 것은 상상이 불가능합니다.

일반 유져들은 이 기계를 정해진 패턴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만, 나는 프로그래머이고 코드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많은 종류의 일(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법의 지팡이는 누구나 들고 있지만 누구나 주문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난 마법의 주문을 알고 있고, 또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프로그래밍의 매력입니다.




[게임 개발자]로서의 나
언급했듯이 나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그래밍으로 밥벌이를 하려고 게임을 만듭니다.

사실 '게임 개발자'라는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난 게임코드 말고도 훨씬 수준 높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게임에서 프로그래밍 코드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내 능력, 내 의도는 물론 정말로 게임개발에 기여한 부분마저도 일반인들에게는 완전히 감춰집니다.

게임 개발은 내 능력을 제한하고 나의 존재를 숨겨버립니다.

게이머로서 나는 나 자신을 감동시키고 재미를 줄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프로그래머로서 나는 정말 죽여주는(일반인들은 물론 절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기술로 기술쟁이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게임 개발자' 직함을 달고서 두 가지중 어느 하나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코드를 작성하기 보다 '가격대비 효율이 높은' 코드를 작성해야 합니다.

내가 재밌고 감동을 받을만한 게임이 아닌 다수의(개인적인 견해로 게임을 X만큼도 모르는) 유져들의 돈을 털어먹을 수 있는 내용을 채워넣어야 합니다.

2년 후에는 이놈의 일을 때려쳐야겠다고 생각하는 큰 이유입니다.



[공학도]로서의 나

현재 직업이 프로그래머지만 스스로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만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학교 3학년때 병역특례로 취업하지 않았다면...남들처럼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해서 얌전히 공부했더라면 틀림없이 전자공학 분야에서 혼자서라도 장난감을 만들며 즐거워했을겁니다.

졸업하기 전에 내가 사용할 앰프는 스스로 만들어냈을거고, 날려먹은 내 첫번째 XBOX의 개조는 알아서 잘 했겠죠.

프로그래밍을 함에 있어서도 행동패턴이나 사고방식은 일반적인 전산과 출신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전공이 전자공학이기 때문만은 아니죠.

가전 제품을 직접 수리하고 싶어서 전자공학과를 택했던건 단순한 객기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게 진짜 그거였죠.

난 기계 만지는걸 좋아하고 관심도 많습니다.

물론 프로그래밍도 '기계를 다루는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망치질을 하고 볼트를 조이는 작업처럼 말이죠. 난 내가 짠 코드가 CPU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처음부터 인간의 언어를 해석해서 작동하는 장치였다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을겁니다. 애초에 사람이 쉽게 다룰 수 있는 기계가 아니었기에 관심이 있었던겁니다.

마법의 주문(이를테면 기계어코드)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석할 수 없었고 그 기괴한 문자들은 내가 보기엔 너무 멋져보였거든요.

직업 프로그래머로서가 아니라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공학도'의 입장으로는 모든 코드를 어셈블리어나 기계어로 작성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용할 OS, 드라이버는 직접 작성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는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며, 상당한 수준에 오르기 전까진 밥벌이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낭만이 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환자(전 이런 자들을 환자라 부릅니다)들이 화질 떨어지는 네가티브 35mm필름에 집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 그들을 바보로 생각하지만 어떤 점에선 같은 부류입니다.

언젠간 돈벌이가 전혀 안되는 멍청한 cpu를 직접 제작할 날이 오겠죠. 그 위에서 돌아가는 os와 컴파일러도 직접 개발할 겁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이 비웃을게 틀림없습니다. 뻘짓한다고.

뭐 뻘짓이면 어떻습니까. 지금 하던 일을 정리하고 그런 바보짓을 하게 될 날을 그려봅니다.



[무술가]로서의 나

나름 도장에서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아마추어는 아마추어고 현재 따져보면 아마추어 중에서도 그렇게 뛰어난 아마추어는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난 15년째 꾸준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나태했던적도 있습니다만, 수련을 완전히 쉬어본적은 없습니다.

영원한 아마추어이기에 평생 이 짓을 계속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선 프로가 아닌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프로그래밍만큼이나 난 무술수련을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만, 몸을 단련함으로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영원한 백띠, 영원한 가라테카이고 싶습니다.



[그 외 기타등등]으로서의 나
분명 그 외에도 여러가지 모습으로서의 '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열거한 항목들 외의 모습으로는 비추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가치를 두고 싶진 않습니다. 아직은 목표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겠죠.



[결론]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요즘입니다.

내가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게 맞게 사는건지 생각해보다가 '나'란 존재를 스스로 판단하고자 몇 자 적어봤습니다.

'현재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앞으로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장황하게 적어놓은 이 글이 질문의 답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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